■세종시대 제주도 주둔 군사는 약3,385명 내외로 지금보다 많다■
아래 실록의 글귀를 살펴보면 약3,385명의 병력도 모자란 셈이다.
현재 제주부대는 뉴스기사를 참고해 제방사(해군)=해군 전대1개 + 해병대대 3개로 편성되어 있을것으로 보여집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왜구(서구)가 제주를 한순간에 천척의 배로 침략한다면 속수무책이니 대비를 해야한다는 임금 과 신하간의 기록이 보입니다.
글쎄요 ?
그시대 1,000척의 전함이면 조선 본토를 치지 1,000척으로 접안 시설도 없는 지금의 제주를 뭐하러 침략할까요?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제주는 사방의 해안이 평야지대라 기록하고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제주 주둔 군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지금의 제주가 아래의 병력수라면 먹여 살릴 백성들 과 이를 동반한 여러 읍성들이 제주를 둘러싸고 있었기에 그런 유적이 섬인지라 그대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세종시대 제주도 주둔군사는 약3,385명 내외》
제주 도안무사 한승순(韓承舜)이 아뢰기를,
"의정부의 수교(受敎)에, ‘본주(本州)가 승평한 지 오래 되므로 수비 방어하는 계책에 혹 소루함이 있을까 하여 신에게 봉화(烽火)와 척후하고 망보는 것을 삼가게 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방수하라.’ 하였으며, 또 ‘왜선의 정박할 요해지와 수비 방어하는 조건을 옛 늙은이에게 물어서 조처하고 아뢰라.’ 하였기에, 삼가 수비하고 방어하는 조건을 보고해 올립니다.
1. 도내에 군인이 주둔한 곳은 본주의 동쪽은 금녕(金寧)·조천관(朝天館)이요, 서쪽은 도근천(都近川)·애월(涯月)·명월(明月)이며, 대정현(大靜縣)은 서쪽은 차귀(遮歸)이요, 동쪽은 동해(東海)이며, 정의현(旌義縣)은 서쪽은 서귀포(西歸浦)요, 동쪽은 수산(水山)이온데 모두가 왜구가 배를 댈 수 있는 요해지오라, 이전에는 다 방어소를 두었습니다.
금녕소(金寧所)의 군인은 마·보병(馬步兵)이 합계 1백 53명이고,
조천관소(朝天館所)의 군인은 마·보병이 합계 1백 3명이며,
주읍(州邑)의 성안 수어소(守御所)인 좌우소(左右所)·둑소(纛所)의 군인은 합계 마·보병 1천 3백 29명이고,
도근천소(都近川所)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1백 44명이며,
애월소(涯月所)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1백 44명이고,
명월소(明月所)의 군인은 합계 마·보병 1백 92명이며,
차귀소(遮歸所)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75명이고,
대정현의 성 지키는 세 곳의 군인은 합계 4백 7명이고,
동해소(東海所)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56명이며,
서귀소(西歸所)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1백 24명이고,
정의현의 성 지키는 세 곳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4백 83명이며,
수산소(水山所)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1백 75명인데,
모두 번을 나누어 방수(防戍)하옵니다.
위의 방호소 외에 왜선이 정박할 만한 염려스러운 곳은 금녕으로부터 조천관에 이르기까지 18리(里) 남짓한 그 안에 세 곳이 있고, 조천관으로부터 주(州)의 읍성(邑城)에 이르기까지 30여 리 안에 일곱 곳이 있으며, 동해로부터 서귀포까지 20여 리 안에 세 곳이고, 서귀포에서 정의(旌義)에 이르기까지의 60여 리 안에 세 곳이며, 수산(水山)에서 금녕까지 40여 리 안에 다섯 곳이오니, 공사(公私)의 노예와 각 소속의 정군 봉족(正軍奉足) 등 잡색 군인(雜色軍人)을 그 다소에 따라 매 1처마다 혹 5, 60명 혹은 1백여 명을 나누어 정하여 번을 갈라서 수어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1. 봉화와 척후하고 망보는 것은 주(州)의 동쪽 금녕에서 주(州)의 서쪽 판포(板浦)까지 10처이옵고, 대정현 서쪽 차귀(遮歸)에서 동쪽 거옥(居玉)까지 5처이며, 정의현 서쪽에서 북쪽 지말산(只末山)까지 7처이온데, 봉화가 있는 곳마다 5인씩 나누어 정하였고, 또 연대(煙臺)를 쌓았는데 높이와 나비가 각각 10척입니다. 망보는 사람에게 병기(兵器)와 기(旗)·각(角)을 가지고 올라가게 하여, 적변이 있사오면 봉화를 들고 각을 불어서 돌려가며 서로 통보하게 하고, 도적이 만약 상륙해오면 육군으로 공격하게 하며, 또 수군으로 협공하여 임기해서 형세를 보아 도적을 쫓아 잡는 것이 실로 양책이 될까하와, 공사(公私)의 적은 배 5, 6척으로 1대(隊)를 편성하고, 매 1척에 노젓는 병졸 4인과 삿대질하는 사공 1인과 사관(射官) 2인을 두었고, 또 싸움을 감독하는 자를 두어서 금고(金鼓)·기각(旗角)·화통(火筒)·화포(火砲)로 싸움을 돕게 하였습니다.
1. 옛 늙은이에게 물어 보오니, 다 말하기를, ‘정의현 동쪽 우봉(牛峯)과 대정현 서쪽 죽도(竹島)는 자고로 왜선이 숨어 정박하여서 가장 요해의 땅이 되옵는데, 우도(牛島)의 인근에 있는 수산(水山)과 죽도(竹島)의 인근에 있는 서귀(西歸) 방호소에는 모두 성곽이 없사온데, 만일 왜적이 밤을 타고 돌입해오면 군사가 의지할 곳이 없사와 응적하기에 형편이 어려우니, 형편을 요량하여 성을 쌓게 하시고 적변을 대응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1. 왜적을 방어하는 방법은 마병 같은 것이 없사온데, 본주(本州)에는 참(站)과 역(驛)이 없으므로, 만약 사객(使客)이나 군기(軍機)의 긴급한 일이 있게 되면 그 전지[田]의 다소를 보아서 말을 차등있게 내게 하여 타게 하매, 군사의 말이 이로 인하여 피폐하게 되었으므로 마병이 불실하게 되어 장래가 염려되오니, 청하옵건대, 목사가 있는 고을과 정의(旌義)·대정(大靜)에 다 참과 역을 두게 하시고, 인리(人吏)나 양민(良民)을 물론하고 1년씩 교대하여 윤차로 입번(立番)하게 하여 마병을 충실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아래는 화포의 사거리에 관한 조선왕조실록 기록 입니다.
세종시대 화포술에 따른 화살의 사거리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3월 30일 계묘 1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화포 제도를 새롭게 할 것을 의정부에 전지하고 대호군 박강을 군기감 정으로 삼다
이번에 만든 것은 화약이 극히 적게 들고도 화살은 1천 3백여 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1천 보까지 가며,
전의 지자화포는 5백 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8,9백 보를 가고,
한 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6,7백 보를 가며,
전의 황자화포는 5백 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8백 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5백 보에 이르며,
전의 가자화포는 2,3백 보도 못갔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6백 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4백 보를 가며,
전의 세화포는 2백 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5백 보에 미치게 되었으며,
전의 여러 화포들은 화살이 빗나가서 수십 보 안에서 떨어지는 것이 태반이었는데,
이번 것들은 화살 하나도 빗나가는 것이 없다.
이번 것들이 비록 이러하지마는, 더욱 정밀함을 구하느라고 지금은 아직 제도를 정하지 못하였다.
내 이제 왕위에 있은지 28년 동안에 화포에 관심을 두고 자주자주 강론하고 연구하여 제도를 많이 고쳤더니,
여러 신하들이 볼 때마다 잘된 양으로 칭찬한다. 오늘날의 만듦새로 보면 전의 화포들은 모두 못쓸 것이 되니 곧 깨뜨려 버림이 마땅하다...
역사를 연구하다보니
오늘날 호주가 제주로 보여집니다.
지금의 제주보다 규모가 있는 귤감..
호주도 벚꽃나무도 수종이 자생합니다.
호주는 남반구이기 때문에 9월에서 10월 사이에 하지만 매우 드물어서 인지도가 낮다고하네요..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을 보면
거북선에 천여명이 승선할수있으며 왜인들이 말하기를 머리와 꼬리에서 하얀 연기가 나오며
노없이 떠다니는게 사람을 죽이는 기계이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즉
증기 거북선을 시사하고 있으며
고종실록을 보면 우리나라 철갑병선 2척과 영국의 크고 작은 배 7척이 같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1884년 자동차 대여제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기사를 보면
우리나라는 1,000만의 군사와 우리나라를 300개의 주 와 군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일본은 8도에 66주로 기록하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