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에 의해 묻혀진 문형산 문형리 되치미 의 유래
현재의 문형산은 옛 넓은 고을 광주의 지형이 잘 나타나 있는 광여도(廣輿圖) 여지도(輿地圖) 조선지도(朝鮮地圖) 지승(地乘)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 해동지도(海東地圖)를 참고해 본래 문현산(門縣山)으로 한성 고을에 들어서는 관문 역할을 하는 산이라 하였으며 실제 군사요충지인 남한산성등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동남권의 관문 역할을 한것을 입증하고있으며 옛 사회과 지도에는 문형산맥으로 통칭해 표기되어 있다.
문형산 문형리 의 유래
조선초기 대학자이자 훈민정음 보급편찬에 공이 많은 문정공 한계희가 성종대왕으로 부터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율동(서근배미)일대를 사패지로 받으며 그 후손중 청연공 한지원이 예문관 대제학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어 묻히고 그의 아들 도곡공 한술이 홍문관 대제학을 하며 문현산 자락에 내려와 살며 그후손들이 세거하며 대제학을 지내신 분이 내려와 지내면서 대제학의 별칭인 문형산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본래 참바다(眞海村)라는 마을이 문형산 아래있어서 문형리로 부르게 되었다.
되치미 마을 의 유래
일제강점기 청연공 한지원의 적장손인 한영달(제적등본 韓意成)은 만주 관동군 참모부 문건을 참고하면 민국임정에 군자금을 지원한 독립군이자 민국임정 21명의 국부 중 한 분이셨으며 이 이후 분당지역 및 용인 정몽주 묘역이 있는 안골 등에 일본군이 독립군 소탕작전을 벌이며 그 이후 친일파들이 족보에 적장자로 위조해 분당 율동 오포 신현리 용인 안골 등의 선산 및 토지를 찬탈하며 한영달의 아들 3형제는 어린 나이에 쫓겨나며 1925년 대홍수 시기 지금의 광주말인 되치미 와 그건너 용인말에 모래사장이 생겨나 뒷산 흙으로 복도작업해 논농사를 하며 3형제 처남들 집안을 불러들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장마철만 되면 물난리에 벼를 되심는다하여 "되치미"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게 되었으며 그 아랫마을 수렁개는 하천으로 이곳 또한 복토작업하여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들어가면 군데군데 수렁이 많아 자주 빠진다 하여 "수렁개"라 불리어졌다.
현재 청주 한씨 청연공 한지원의 진짜 후손은 되치미 한씨이며
분당 율동 과 용인 정몽주 묘역 안골은 되치미 한씨들의 묘역으로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이 찬탈해 살기 시작하였다.
<되치미 한씨>